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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뫼 허웅

1_1- 눈뫼 허웅(상)

서슬 퍼런 일제의 억압도 한글 향한 열정 못이겨
평생을 '한글사랑 나라사랑'에 바친 한글학자 눈뫼 허웅(상)

김해는 한 나라의 도읍이 될 만한 기운을 가진 땅이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 중에는 큰 인물들이 많았다. 나라를 위해, 학문과 예술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알려졌으되, 김해 출신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특히 그 업적과 성과가 세상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김해뉴스>는 창간 1주년을 맞아 '발굴-김해인물열전' 시리즈를 시작한다. 새롭게 '인물'을 발굴하기도 하겠지만 기존에 알려진 인물들의 업적을 새롭게 조명해 세상으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게 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세종대왕께서 지으신 한글을 한힌샘 주시경이 국어학의 주춧돌을 놓았고, 외솔 최현배가 집을 지었으며, 눈뫼 허웅은 그 집을 말끔히 보수하는 구실을 했다.' 국어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평생을 '한글사랑 나라사랑'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던 허웅(1918~2004) 선생은 김해 사람이다. 허웅 선생은 알지만, 김해사람인 줄은 몰랐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김해뉴스>는 이번 호에는 생활인으로서의 허웅 선생 모습과 김해 사랑의 마음을, 다음 호에는 교육자와 학자로서의 면모를 더듬어 보려 한다.

1918년 동상동에서 태어나고 자라 김해보통학교 거쳐 동래고보 진학 고보 3학년 때 국어공부 매진 결심
1945년 김해에서 지역민 한글강습 등 자신의 모든 것 건 또다른 독립운동

허웅 선생은 김해 동상동 965번지에서 1918년 7월 26일, 부친 허수 모친 윤영순의 5남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해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 23회)를 졸업한 허웅 선생이 생전에 여러 매체에 남긴 글에서는 고향인 김해를 사랑하는 마음을 많이 느낄 수 있다.

"내 고향은 경남 김해이다. 옛날 가락국의 서울이었던 김해이다. (중략) 나는 내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랐다. 무슨 자랑거리가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되나, 첫째 자랑거리는 거기가 옛 서울이라는 것, 그래서 김수로왕의 왕릉이 읍내 한가온데 있고, 북으로는 허왕후의 왕릉이 있다는 것이다. 김해 주변의 다른 고을 어디에 이런 자랑거리가 있을까? 다음으로 자랑이 된다고 생각한 것은 김해평야다. 그 넓은 김해평야에 누른 벼가 익어 갈 때면, 나는 만장대에 올라 그 금빛 벼바다를 내려다보며 그 사이를 누비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에 내 어린 낭만을 적셔보기도 했다."(농민신문. 1979. 4. 2.)

낙동강 줄기에 낭만을 적셔 보던 소년 허웅은 동래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동래고보 시절에는 럭비와 축구선수로 활동할 만큼 활발하고 건장했으나, 2학년 때 폐결핵으로 1년간 휴학을 했다. 김해의 집에 돌아온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본 어머니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후 3학년에 복학하면서 국어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핍박했던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글 연구에 매진한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창원 용원 사설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김해 읍내의 산업조합에서 서기 노릇도 했다.

1942년 혼인을 한 선생은 부인 백금석 여사와 용원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때의 추억을 담은 시도 남겼다. '너무나 적막하고 /밤이면 늑대 소리, /김해읍 가려면은 /물길 물길 걸어야 해. /그래도 신혼살이 꿀맛만 같았었지.' 2002년에 이 시를 쓸 때 선생은 부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십여리 길을 걸어 고향 김해로 가던 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1944년에는 김해읍 논실마을(현 대성동 2구 본부락) 333번지에서 첫 아들 황이 태어나는 기쁨도 누렸다. 광복을 맞았으나 한글교육을 받지 못해 우리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선생은 1945년에 김해에서 한글 강습소를 열고 강사로 활동했다. 김해에는 어쩌면 허웅 선생에게 한글을 배운 어르신이 아직 살아계실지도 모른다. 허웅 선생은 이렇게 김해에서 한 가정을 이루고 한글 강습을 시작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부산대학교에서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던 선생은 이후 서울에서 생활했다. 서울에 살면서도 김해를 자주 찾아왔고, 늘 고향인 김해를 자랑했다고 한다.

허웅 선생이 살았던 동상동에는 허웅 선생의 육촌 재종 아우인 허정(78) 씨가 아직 살고 있다. 허웅 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 분성로 345-22에는 현재 원룸이 들어섰다. "큰집을 중심으로 반경 100여m 안에 양천허씨 일가들이 모여 살아서 사촌, 육촌들도 함께 우애를 나누며 자랐지요." 허정 씨는 "형님은 공부를 할 때, 창문이나 문에 이불을 둘러쳐 놓고 했습니다. 공부에 집중하려고 한 것도 있지만, 당시에는 공습이 수시로 있었으니 바깥으로 불빛이 새어나가면 안되는 시절이기도 했습니다"라며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약 학자가 안되었다면, 성악가나 가수가 되었을 겁니다. 가곡을 부를 때는 모두들 감동에 젖곤 했습니다."

허웅 선생은 등산을, 그것도 눈오는 겨울산을 좋아했다. 그런 선생을 보면서 동기들과 제자들이 '눈뫼'라고 호를 지었다. 눈뫼의 뜻은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 박사가 바친 추모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눈보다도 희고 희고 뫼보다도 높고 높다 허다한 길을 두고 한글에 몸을 바쳐 웅대한 겨레 구원의 꿈 일워질 날 멀잖아.'

앨범과 책을 넘기며 옛 추억을 들려주던 허정 씨는 선생이 마지막으로 김해를 방문한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해 출신 영문학자 김종출 박사의 문학비가 국립김해박물관 앞 문화의거리 솔밭에서 제막식을 하던 2002년 10월 18일이었습니다."

선생은 평생 의지하고 은애했던 부인 백금석 여사를 2001년 11월 먼저 보내고, 2004년 1월 26일 10시 13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였다. 한글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고, 고향을 사랑했던 허웅 선생이지만, 허웅 선생을 낳은 김해에는 아직 선생을 기리는 작은 기념물 하나 없다.

막내아들 허원욱 교수가 기억하는 허웅 선생
"김해를 늘 그리워하셨던 아버지"

허웅 선생은 백금석 여사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김해에서 태어난 첫아들 황은 울산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정년퇴임 했다. 서울에서 차남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원욱은 문법론을 전공한 국어학자로, 현재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에서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허원욱 교수는 아버지 허웅을 이렇게 전해주었다. "신혼시절 용원 앞 바닷가에서 어머니만을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셨답니다."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 불렀던 낭만적인 모습은 허 교수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달 월급을 전부 모아 기타를 살 정도로 기타를 좋아하셨답니다. 저도 어렸을 적 아버지가 부르시던 노래 '성불사', '가고파'를 듣곤 했지요."

선생의 삶은 한글 연구 그 자체였다. "집에서는 말씀이 별로 없으셨습니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시면 한 두 시간 서재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학교 강의를 마치고 난 뒤에 일이 있으면 약주도 하셨지만, 약속이 없으면 일찍 귀가하셔서 또 책을 읽으셨어요. 어린 저도 '아버지는 학자'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아버님은 고향 김해를 자주 말씀하셨고, 늘 그리워하셨습니다." 허 교수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학자로서의 모습, 예술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자, 고향 김해를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했던 눈뫼 허웅 선생의 모습을 되살려주는 소중한 추억들이었다.

  • 허웅 선생 강의 중인 허웅 선생의 모습. 선생에게서 강의를 들었던 많은 후학들이 오늘날 국어학자가 되어 또 다른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김해문화원
  • 허웅 선생 동래고보를 다니던 청소년기에는 럭비와 축구팀에서 주장으로 활동했다.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 허웅 선생 방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인자한 모습

1_2 눈뫼 허웅(하)

"나랏말은 정신이며 겨레문화의 원동력이다"
평생을 '한글사랑 나라사랑'에 바친 한글학자 눈뫼 허웅(하)

동경제국대 입학 수순 마다하고
외솔 재직 연희전문학교 진학
일제가 최현배 선생 체포하자 중퇴 후
독학으로 국어 연구
부산대·서울대 등 교수 재직하며
언어과학적으로 한글 분석·연구
국어문법 체계 확립하고 정착시켜
저서 수십권 서술하며 후학 양성

"한 방 가득 둘러서 있던 책꽂이와, 그 안에 가득한 책들, 낡은 책에서 배어 나오는 향긋한 종이 냄새, 책상 위의 원고지. 그 속에서 조용히 앉아 무언가를 읽고, 쓰고 계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허웅 선생의 맏손녀 허누리 씨가 추모문집에 남긴 글 중 한 대목이다.

이번 호에서는 한글 사랑과 학문 연구로 일관했던 허웅 선생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더듬어 본다. 선생의 업적, 저서, 논문을 연대순으로 열거만 해도 이 지면이 다 차버릴 것이다.

선생이 동래고보에 재학하던 시절, 교사들은 우수한 제자인 허웅을 동경제국대학 진학의 수순으로 동경제일고등학교 입학을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허웅 선생은 이를 마다하고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재직하던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했다. 한글을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 열여덟이었다.

일제의 핍박이 날로 심해지던 시절, 선생은 오직 한글을 생각하는 삶을 선택했다. 외솔의 '우리 말본'을 읽었고, 학우들과 비밀독서모임을 이끌면서 항일 의지를 길렀다. 그 결정이 21세기인 지금,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다음 해 외솔이 일제의 압력으로 교수직에서 파직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선생은 혼자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40년 중퇴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독학으로 15세기 국어를 연구하며 세계의 저명한 언어학 이론을 공부했다. 8·15광복과 동시에 고향 김해에서 한글강습소를 열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1947년 9월 서른 살의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되었다. 부산대학교 교수로 출발하여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그들이 오늘날 전국의 강단과 교단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국어학자가 되었다. 선생은 한글을 언어과학적으로 분석·연구하여, 세계의 그 어떤 문자보다 한글이 우수함을 알렸다. 허웅 선생의 업적과 이름은 국내에서보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에게 더 높이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한글학회 이사를 맡고 있는 하치근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허웅 선생은 우리 국어를 언어학 이론에 입각하여 연구한 공적이 크고, 세계적인 학자들이 경탄하는 인물입니다"라고 말한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한힌샘 주시경이 현대학문으로서의 바탕을 만들고, 외솔이 그 기반을 닦았습니다. 허웅 선생은 홀로 영어·독어·불어·일어·중국어 5개 국어를 익히며 언어학 이론 원서를 연구했습니다. 구조언어학의 바탕 위에서 국어문법의 체계를 확립하고 정착시켰습니다. 허웅 선생의 노력이 있어 한글이 세계 언어학자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 교수의 설명이다. 구조언어학이란, 언어의 구성요소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그 구조를 기술·해명하려는 근대언어학 이론이다.

자주·자립적 국어학의 초석을 놓은 주시경, 국어문법의 체계를 세우고 애국적 계몽주의 국어학을 확립한 최현배에 이어, 허웅 선생은 국어학을 언어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학자로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하 교수는 허웅 선생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동아대 재학 시절 허웅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국어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졸업 후 김해중학교와 김해여고에서 근무했다. 당시 허웅 선생은 한글학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한글학회는 여러 지역에 지회를 설립했다. 조건은 지역에서 국어를 연구하는 대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 때만 해도 김해에는 대학이 없었다. 그러나 허웅 선생의 고향인 김해에 한글학회 지회가 없다면 말이 되느냐는 의견에 힘입어 김해지회가 결성되었다. 1975년에 열린 전국학술발표회에서 하 교수는 쟁쟁한 교수들 사이에서 김해여고 교사로 발표회에 나섰다. 발표가 끝난 후 날아드는 날카로운 질문들에는 허웅 선생이 직접 나서 설명도 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공부를 계속해 국어학자로 새 출발을 해보라"고 권유하는 엽서를 보냈다. 하 교수는 허웅 선생의 엽서 덕분에 교수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선생께서는 좀 뒤처지는 제자에게도 꾸짖지 않고 보살펴주시며, 스스로 정해진 길로 가도록 인도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라고 스승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현재 한글학회 김해지회의 활동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허웅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강조했다.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정신이며, 그 겨레의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 말글과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것에서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은 선생의 영전에 "이 모든 말씀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이 땅을 이어갈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말과 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러주고 계신 것"이라는 말을 바쳤다.

허웅 선생은 수십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국내 최초로 음운학의 공시적·통시적 체계를 세운 '국어음운론'(1958),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인 '언어학개론'(1963), 15세기 국어문법을 서술한 '우리옛말본'(1975), '국어학-우리말의 오늘, 어제'(1983),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 등 지금도 후학들에게 보배롭게 읽히고 연구되고 있는 책들이 많다.

선생은 연구와 저술에도 전심전력을 다하였지만, 훌륭한 후학들을 길러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서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허웅 선생의 제자, 제자의 제자가 아닌 이를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선생은 삼십여 년 간 한글학회를 이끌며 반석에 올려놓았고, 한글전용론을 주장하고, 한글날 공휴일 폐지 반대운동을 펼치는 등 평생을 한글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지병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도 한글학회 사업을 챙길 정도로, 선생은 마지막까지 한글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눈뫼 허웅 선생은 이 땅에 와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오롯이, 우리 말과 글을 위해 살다 간 높고 큰 산이었다.

생전에 외솔상(1973), 국민훈장 모란장(1973), 성곡학술문화상(1986), 세종문화상(1990), 주시경학술상(1993), 세종성왕 대상(1998) 등을 받았고, 200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허웅 선생 기념사업 추진 김국권 경남도의원 "생가터 표지석 하나 없어 … 기념관 지어 한글학당 열 것"

김국권 의원은 2011년 1억5천만 원, 2012년 2억의 도비를 확보했다. 김 의원은 "생가가 있던 자리인 분성로 345-22에는 원룸이 들어서 있어 현재로선 생가를 복원하기는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 의원은 "생가를 복원하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한글학자인 선생의 뜻을 생각한다면 김해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이주민과 다문화가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다"며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말했다. "김해시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김해문화원에서도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글학회에도 연락을 하고 여러 의견을 모아, 허웅 선생의 뜻에 맞는 기념관을 지어 한글학당을 여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설명했다. "나 역시 김해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한 김해사람으로서 허웅 선생을 뒤늦게 알았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김 의원은 생가터를 돌아보았다. 세계적인 언어학자이며 한글의 큰 기둥인 허웅 선생이 태어난 김해의 생가터에는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허웅 선생 허웅 선생
허웅 선생은 우리 말글과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것에서 나아가 살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제공=김해문화원
  • 김해의 옛집 마당에서 김해여고 학생들과 함께 한 허웅 선생 김해의 옛집 마당에서 김해여고 학생들과 함께 한 허웅 선생. 1976년 10월 17일의 모습
  • 1976년 한글회관 건립 기공식에서 말씀 중인 허웅 선생 1976년 한글회관 건립 기공식에서 말씀 중인 허웅 선생. 한글회관은 1977년 10월에 완공, 개관됐다
  • 허웅 선생의 생가터에서 기념사업 계획을 설명하는 김국권 도의원 허웅 선생의 생가터에서 기념사업 계획을 설명하는 김국권 도의원